내동칼럼 “언제”가 아닙니다. “누가”입니다.(너울에 관해서) (이현웅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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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7월 26일 2014년본문
“언제”가 아닙니다. “누가”입니다.(너울에 관해서)
고전11: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고전11: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그 동안 모임 안에서 당연시 되던 너울을 쓰는 문제가 지금은 재고를 하여야 하는 문제로 거론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 동안 살펴보지 못했던 5절 말씀의 원어의 문법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법이 모든 공적집회에서 여자들이 너울을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급속하게 확산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너울을 교회확장의 장애요소로 생각을 하고 있던 몇 몇 인도자들이 이것을 빌미로 자매들의 머리에서 너울을 벗어 버리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임은 모임인데 과거에 모임의 상징과도 같던 너울을 쓰지 않은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5절 말씀은 이들의 이와 같은 행위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간단하게 서술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5절 말씀의 문법만을 놓고 본다면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5절의 기도하고 예언하는 주체가 여성단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법적으로만 보면 이 말씀은 여자 본인이 기도하고 예언할 때에 너울을 써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 모임 안에서 자매들에게서 너울을 벗게 한 모임들의 인도자들이 너울은 여자가 기도하고 예언을 할 때에만 사용을 하는 것이며 그것도 그 행위를 할 때에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공적모임에서 모든 자매들이 너울을 쓰는 것은 말씀이 증거해 주는 바가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물론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을 할 수 있는 모임은 제한적이라고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전인수적인 잘못 되어도 아주 잘못된 분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해석을 한다면 4절 말씀은 이와 같은 해석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말씀하는 당사자인 형제가 그 행위를 할 때에만 너울을 쓰지 않고 그 행위를 하지 않을 때나 행위를 하지 않는 나머지 형제들은 너울을 써야한다”라는 해석을 해야만 합니다.
5절 말씀의 원어적 문법을 근거로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여인들이 그 예언을 할 때에만 너울을 쓰는 것이며 그 행위를 하지 않을 때나 그 행위를 하지 않는 교회 안의 여인들은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4절의 기도하고 예언하는 주체가 남성이고 단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5절의 헬라어 문법만을 가지고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정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4절 말씀을 헬라어 문법만 가지고 해석을 하게 되면 바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너울을 벗은 분들의 주장과 같이 5절이 교회 안의 여자들이 언제 너울을 써야 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4절도 교회 안의 남자들이 언제 너울을 벗어야 하느냐는 말씀으로 보아하는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의 여자들이 너울을 벗는 것이 바른 분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교회 안에 남자들이 너울을 쓴다는 것을 절대로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남자가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은 이 분들도 당연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남자들은 지금까지 너울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4절의 헬라어 동사의 문법이 교회 안에서 집회 시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남자들이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것도 가르치고 지금까지 남자들이 너울을 쓰지 않던 것이 잘못된 분별이라고 말하고 집회 시에 남자들에게 너울을 쓰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5절을 언제 교회 안의 여자들이 너울을 써야 하는 문제로 본다면 4절을 언제 남자들이 너울을 쓰지 않아야 하는 문제로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과 5절은 “언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너울을 써야 하느냐의 문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절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질서를 회복한 그 표를 남자와 여자 중 누가 가질 것이냐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을 4절에서 문법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지 않지만 그것을 모두가 인정을 하고 너울을 쓰지 않는 다면 5절에서 여자들이 너울을 쓰는 것을 문법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지 않지만 쓰는 것이 맞는다고 인정을 하고 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문법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지 않지만 남자가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이나 여자가 너울을 쓰는 문제를 4절과 5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요. 4절의 기도하고 말씀을 하는 남자는 그 집회에 참석한 모든 남자의 대표이고 5절의 여자는 그 집회에 참석한 모든 여자의 대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너울을 쓰지 않는 것과 여자가 너울을 쓰는 것은 그 당사자가 그 행위를 할 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남자와 여자에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 안에 모든 사람이 있고 주님 안에 모든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곳곳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대표의 원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에도 적용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태어나지도 아니한 레위가 십일조를 드렸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행위의 당사자가 아닌데도 그가 그 행위를 한 것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원리가 4절과 5절의 남자와 여자라는 단어에 적용이 된 것입니다.
5절의 여자가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것도 남자 안에서 한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고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 실 때에 태어나지도 아니한 우리들이 주님 안에서 함께 죽은 것과 같은 대표의 원리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은 주님이신데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이 함께 죽은 것처럼 공중집회 시에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이는 남자들인데 여자들이 그 안에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절의 바른 분별은 남자들이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모든 공중집회에서 여자들은 너울을 쓰는 것입니다.
공중집회 시에 남자들이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자들이 너울을 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 영역을 통해서도 교훈을 해주시고 있습니다.
고전11: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고전11: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도 남자와 여자 중 남자가 짧은 머리를 하고 여자가 긴 머리를 하는 것이 맞는다고 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곧 머리를 기려야하는 자가 여자라는 것을 일반인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 곧 공중모임 시에 남자는 너울을 쓰지 않고 여자가 너울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원어의 문법을 잘 몰라도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흔들리시지 말고 계속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말씀을 바로 분별한 것이고 바른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울에 관한 교제는 벌써 4차례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원어의 문법을 가지고 너울을 벗으려는 이들의 분별이 얼마나 잘못된 분별인가만을 서술하려 하였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시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