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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내동칼럼 너울에 대한 바른 분별(고전11:5) (이현웅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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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7월 24일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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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a de gunh proseucomenh h profhteuousa akatakaluptw th kefalh kataiscunei thn kefalhn eauths en gar estin kai to auto th exurhmenh


 

11:5 But every woman that prayeth or prophesieth with [her] head uncovered dishonoureth her head: for that is even all one as if she were shaven.

 

고전11: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위의 말씀은 고전11:5절 말씀의 헬라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 말씀들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원어를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들이 이해 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봅니다. 그러나 가끔 원래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언어로 된 번역본이나 원어 성경을 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위의 우리말 성경이 원어 성경과 비교를 해서 잘못 번역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잘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영어성경이나 원어 성경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전11:5절 말씀은 원어 성경과 비교를 해 볼 때에 우리 말 성경이 너무도 훌륭하게 번역이 된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어감 상 오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은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라고 번역이 된 부분입니다. 이것 헬라어나 영어에 보면 “akatakaluptw(uncovered)”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머리에 쓰지 않고”라고 번역이 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로 우리 성경에 “무릇 여자로써”로 번역된 부분이 또한 그렇습니다. 이것은 헬라어와 영어에 " pasa de gunh(But every woman)”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언어의 한계 안에서 최대한 합당한 단어를 취해서 번역을 하였지만 우리 말 성경만으로는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다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는 듯 합니다.

“pasa”나 “every”를 번역한 “무릇” 이라는 단어가 원래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지를 않습니다.

 

“무릇”이라는 우리나라 말의 뜻은 “통상적으로” “전체적으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헬라어의 “파사(pasa)”는 “모든” “모두 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을 해본다면 이렇게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모든 여자는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머리를 민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기도나 예언을 할 때에 모든 여자들이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반대하는 분들이 지적하는 한 가지 원어의 문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 분들은 이 문법적인 문제로 이 말씀을 잘못 이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가지고 잘못된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먼저 이들이 지적하는 원어의 문법적 문제를 살려 보겠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예언”을 하는 주체가 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도하는”, “예언하는” 이라는 원어의 동사의 “성”과“수”가 여성이고 단수를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 원어인 “proseucomenh”(기도하는), “profhteuousa”(예언하는) 이 여성단수입니다. “태”도 하나는 중간태이고 하나는 능동태입니다.

 

그러니까 이 동사의 문법만 놓고 보면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주체가 “한 여성”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사의 문법만을 놓고 본다면 이 문장을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말씀과 기도를 할 때에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은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이것은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임이라”


 

그러므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하는 여인은 모든 여인이 아니라 기도와 예언을 하는 여인이며 그것도 기도와 예언을 할 때로 국한이 된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사의 문법적인 형태만 보고 해석을 한 것으로써 분문에서 말씀해 주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원어의 “모든 여인”에 대한 동사의 문법적 형태가 그런 것이지 이것은 기도하는 여인, 한 사람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기도하고 예언하는 모든 여인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분별은 모두 여인이 머리에 수건을 쓰면 남자들이 기도나 예언을 하는 모임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할 수 있는 것이냐는 도전에 직명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고전14:34절 말씀이나 딤전2:12절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들에서는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고 했고 남자를 주관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수건만 쓰면 여자가 남자들이 말하는 모임에서 같이 말하고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자의 수건이 집회에서 말하는 여인들에게만 그것도 그들이 말할 때에 만으로 국한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분들은 여자들이 말할 수 있는 집회가 따로 있다고 말을 하면서 탈출구를 만들었습니다.

여자들이 수건을 쓰고 말을 할 수 있는 집회가 가정 집회라든지 주일학교 같은 집회로 국한 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궁색한 변명처럼 보입니다.


가정 집회나 주일학교 집회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고 다른 집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하는 또 다른 질문을 낳게 되기도 합니다.

고전11:13절에서는 여인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수건을 쓰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가정 집회에도 주일학교 집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집회의 특징을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일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러므로 소규모집회와 다른 집회를 분리를 해서 여자가 수건을 쓰고 말할 수 있는 집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한 분별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의 집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집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모이는 세상집회와 다릅니다.


 

그러면 고전11:5절을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모든 여자가 너울을 써야 한다”고 하는 보는 이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기도하고 예언하는 주체를 여인들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분별은 원어의 문법에 배치가 된다는 도전에 직면을 하게 됩니다.

원어의 문법은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이가 분명히 단수의 여성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것도 수동태가 아니고 중간태와 능동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주체를 여인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 문법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지만 성경을 통해서 보면 도저히 그 주체를 여자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14:34절과 딤전2:12절이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예언하는 주체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입니다.


그리고 4절과 5절의 집회도 동일한 집회입니다. 서로 다른 집회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왜 동사의 문법이 그렇게 사용이 되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수”입니다. 기도하고 예언하는 이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면 복수를 나타내는 동사가 사용이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은 아마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어 자체가 단수의 형태를 갖은 복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성”에 대해서 서술을 하겠습니다.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주체가 남자라면 동사의 성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될 것입니다.

집회 시 형제들이 기도를 할 때에 자매들이 함께 기도에 동참을 합니다.

비록 소리를 내서 참여를 하지 않지만요. 형제들이 대표해서 기도를 할 때에 거기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매님들도 포함해서 이지요.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남자들이 기도를 하지만 자매들도 함께 참여를 하기 때문에 여성동사가 사용이 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언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이것은 대표의 원리입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모든 사람이 범죄를 한 것과 같고 주님 한 분의 죽으심이 모든 사람의 죽음이 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여자의 머리는 남자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예언을 할 때에 그 안에서 여자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예언의 주체가 남자이지만 동사의 성이 여성이 사용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11:5절의 집회는 남자들이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모든 여인들이 침묵하며 동참하는 중에 너울을 써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는 것이 아마도 성경의 전체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예언하는 주체를 원어의 문법적인 문제를 들어서 여인이라고 주장을 하게 되면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에도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11:5절의 의미가 수건을 써야하는 것이 소규모임에서 기도하고 가르치는 여인들에게만 국한이 되고 그 외의 모임이나 기도하고 가르치지 않는 여인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고전11:4절의 의미는 남자가 기도하고 예언을 할 때만 수건을 쓰지 않고 자신이 말하지 않는 모든 모임에서 남자는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회에서 말하는 형제들뿐만 아니라 말하지 않는 형제들도 수건을 쓰지 않는 것처럼 집회에서 모든 자매들은 수건을 쓰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말하는 자매만 수건을 써야만 하고 말하지 않는 자매들은 수건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말하는 형제만 수건을 쓰지 않고 말하지 않는 형제들은 수건을 써야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공중집회에서 형제들은 수건을 쓰지 않고 자매들은 모두 수건을 쓰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1:5절의 원어 동사들의 형태를 가지고 기도하고 예언하는 주체가 여인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너울을 결과적으로 모든 자매들에게서 벗기는 일을 합니다.

원어까지 들먹이며 그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미혹을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모임의 분별이고 다른 분별도 존중을 한다고 하지만 그분들은 이것이 수건에 대한 바른 분별이고 지금까지 모임의 인도자들은 바른 분별을 갖지 못했다고 공공연하게 비방을 합니다.


 

또 실제적으로 많은 일꾼들이 이런 주장 때문에 자책에 빠지기도 하였고요. 그리고 수건을 벗는 일에 동참을 하기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집회에서 자매들이 수건을 쓰고 주님을 섬기는 모임들이 더 많이 있음을 인해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임들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기를 간구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