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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내동칼럼 신학을 했으면 좋겠다고요? (이현웅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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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4월 24일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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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했으면 좋겠다고요?

 

빌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얼마 전 우리 부부가 한국에 있을 때 한 모임에 참석을 하고 돌아온 딸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신 형제님이 “너희 중에도 신학을 하는 이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혹 너희 중에 신학을 하기를 원하는 이는 없니?”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전해 놓고는 결론을 그렇게 내는 것을 보고 실망을 금하지 못했다고 하는 말도 덧붙이며 위의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희 부부는 충격을 받았고 이제는 그 모임에 아이들을 더 이상 가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 한 형제님을 통해서 많은 현직에 있는 일꾼들이 실제적으로 신학을 하고 있고 또 이 일에 대해서 서로 격려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서 들었을 때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데 이제는 그 누룩이 젊은 세대에게까지 번지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정말 누룩처럼 온 덩이에 펴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합니다.

 

언젠가 한 번은 자신의 모임의 차세대를 준비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미국의 한 성경학교에 보내려고 한다는 형제님과 과연 이것이 정말 성경적인 차세대를 준비하는 방법인지에 대해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위의 말씀은 제가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 교제를 나눌 때마다 사용을 하는 말씀 중에 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말씀을 깨달으면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참된 일꾼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 때까지 의지하고 자랑하던 신학과 교파를 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누가 참 할례당이냐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참 할례당의 처음 조건으로 제시한 “성령으로 봉사하며”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말씀이 또한 하나님의 일꾼이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봉사”는 일꾼들의 하는 일을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가 참 할례당이라고 하는 말씀을 통해서 참 하나님의 일꾼은 성령으로 봉사를 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 말씀이 또한 누가 성령으로 봉사를 하게 되느냐에 대해서도 보여 주고 있는데 그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자랑삼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가 성령으로 봉사하는 참된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까지 많은 자랑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장자교단인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라는 자부심

 

둘째는 직책에 대한 자부심

본인 또한 장로교의 전도사라는 자부심과 장차는 기독교 철학을 전공하여 정통신학을 겸비한 목사가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인한 자부심

 

셋째는 열심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했던 새벽기도와 십일조 생활,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하던 철야기도 등으로 인한 열심에 대한 자부심 등등

 

주님이 아닌, 수 없이 많은 자랑들이 마음속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자랑들이 자신을 신뢰하게 하였고 그래서 성령님이 아닌 혈통과 이력과 자신의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때는 저는 성경이 말하는 참 할례당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일꾼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한 저의 열심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바로 저의 의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 던 어느 날 나의 참된 의가 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나의 모든 자랑과 의는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것들은 자랑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까지 의지하고 있었던 전도사와 신학교의 이력도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읽으며 많은 의문들이 있었지만 신학은 그것들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신학을 공부하며 성경에 대한 의심과 의문들만 더 갖게 되었습니다.

 

예정론을 배우고는 너무나 내 인생이 꼭두각시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모든 것을 예정하신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으로 누워서 몇 날 며칠을 지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서 영안이 열린 그 날부터는 성경이 열리기 시작을 하였고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의문들이 한 번에 풀어졌습니다.

또한 자원하는 심령과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됐습니다.

 

물론 이 때부터 하나님의 일꾼에 대한 생각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신학교를 나와야하고 목사고시를 보고 패스를 해서 정식교단에서 안수를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목사가 고시를 패스해서 된다고 나와 있지 않는데 어쩌면 그렇게 그런 잘못된 교회의 법들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믿었던 것일까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눈이 열리고 나니 이런 것들이 비로써 보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열린 눈으로 성경을 보면 볼수록 지금까지 제가 가고 있던 길이 성경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길을 깨달으면서 그 간의 하나님을 섬긴 저의 날들이 헛된 날들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계명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 늦게라도 깨닫게 하셔서 성경의 길 곧 바른 길을 가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오늘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쓰는 것은 저와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떠나왔던 잘못된 길을 일부 모임의 일꾼들이 앞장을 서서 가고 있고 젊은이들에게 그 길이 바른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신학을 권장하는 일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룩이고 누룩을 온 덩이에 번지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결코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위의 말씀을 깨달으며 저의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이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버렸던 그 길을 많은 이들이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었던 것을 저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성령으로 봉사를 하며”라는 말씀을 통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봉사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성령님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산위에서 가르치시고 기도하라 하셨고 구하는 자에게 성령님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자기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기도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라는 말씀을 통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 곧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랑 거리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빌3: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물인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은 자기 자랑이 많습니다. 특별히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 더욱 그렇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자신들의 자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자들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은 더 이상 자기에게 자랑 거리가 없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고전1:30-31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되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으시고 은혜로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엡2:8,9절)

일꾼을 택하실 때에도 문벌 없고 무명하고 약하고 천하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에 하나님을 가르칠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또 하나님께서 부족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부요하고 능력 있는 이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들보다 지혜가 부족하시고 능력이 없으셔서 도움을 받으시려고 일꾼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업들은 유능한 사람들을 고용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원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자기의 유능함을 내세우는 이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무능함을 말하며 주님을 자랑하는 이가 필요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라는 말씀으로 말하기를 원합니다.

육체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갖게 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신뢰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것을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혈통이라든지, 세상지식, 명예, 경험 등을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혈통이라든지 좋은 문벌과 높은 지위를 갖은 자들은 그것을 의지하고 푼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선용을 하면 하나님의 일을 더욱 효과적으로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능이나 지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일은 원수 마귀와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부자의 재물도 학자의 지식도 유명인사의 명예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가끔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곤 합니다.

이때마다 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자인가를 절감을 하곤 합니다.

또한 복음을 전할 때마다 제가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을 하곤 합니다.

 

마귀의 사망권세를 이기신 주님, 영혼을 마귀의 이 사망권세에서 건지시는 주님만이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눅18:27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시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큰 역사를 이루었던 이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잘 배운 제사장들의 무리에게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비추어졌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알고 주님을 경험하므로 그들의 믿음이 자라갔던 것입니다.

 

수 없이 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한 디엘 무디가 그랬습니다.

그는 신학을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인 학문도 초등학교가 전부인 사람이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로 알려진 조지 뮬러는 어떠했다고 알려졌습니까?

그는 세상의 어떠한 이력을 이용해서 그의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였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의 신앙에 빠져 있는 한국교계에 구원의 복음의 열풍을 몰고 왔었던 이들은 어떠합니까?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먼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오직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을 의지하여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주님께서 사용을 하셨던 이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도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모임에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합시다.

 

모임의 장래를 위해서 신학을 했으면 좋겠다고요?

이것은 모임의 장래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모임을 병들게 하고 믿음의 일꾼들과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 일일 뿐입니다.

 

이것은 모임을 교파처럼 타락을 하게 하는 누룩입니다.

이 누룩이 더 이상 펴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신학을 해야 모임의 장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누룩을 제하여야만 모임의 장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누룩을 제하지 아니하면 모임은 또 하나의 교파로 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