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동칼럼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이현웅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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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1월 25일 2014년본문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요3:8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롬8:2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17절과 18절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면 어떠한 일을 초래 하는 가에 대해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19절과 20절 말씀을 통해서 율법과 성도와의 바른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면 일어나게 되는 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16절에서 증거해 주고 있는 데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성도가 어떻게 다시 죄인으로 나타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말씀의 배경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게바 곧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가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할례자들이 들이닥치자 뒤로 물러난 일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방금 전에 이방인과 식사를 한 일은 믿음으로 한 일이지만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서 뒤로 물러난 일은 율법을 쫓아서 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지만(롬3:22) 율법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방인들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음식을 먹습니다.
그렇지만 게바가 이들과 식사를 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로 인해서 식사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베드로가 다시 이렇게 율법으로 돌아서므로 믿음으로 행한 일이 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된 이가 이렇게 율법으로 하면 다시 죄인이 됩니다.
게바는 이방인과 식사를 한 것이 죄가 되었지만 이것 외에도 정말 많은 일들이 죄가 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일, 절기들을 지키지 않는 일,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 여자가 바지를 입는 일, 남자가 수염을 깎는 일, 여러 실을 썩어 짠 옷을 입는 일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일이 죄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율법은 그림자이고 참 형상이 그리스도라 하시며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신 주님이 율법을 범하게 하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라는 말씀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주님은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을 우리를 죄를 짓게 하려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성도가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가 율법을 다시 세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18절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과 식사를 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율법에서 죄가 될 뿐입니다.
네팔의 성도들도 힌두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힌두의 법은 천민인 수드라와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합니다.
이들이 부정한 자이고 그래서 이들과 접촉을 하면 부정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천민들과 거리낌 없이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힌두 법에 대해서 열심히 있는 자신의 부모가 오면 천민들과 식사를 꺼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힌두 부모가 보기에는 그리스도가 이들로 천민들과 접촉하는 죄를 범하게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두려워하여서 천민인 성도와의 접촉을 꺼려하는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 힌두 법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폐하여졌던 힌두 법을 다시 세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문제가 아니라 율법으로 돌아가는 성도가 문제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와 같은 유혹을 받아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초래가 되는 가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를 해 준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쯤이면 확실히 이해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날에도 그리스도를 죄를 짓게 하는 분으로 만드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믿고 구원을 받아서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구원을 받기 전에 교파에 속하여 그 교단의 교리를 쫓아서 하나님을 섬겼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는 다시 교파의 교리로 돌아가지 않고 성경진리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데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지 않는 교파를 사용하지 않고 있고 은사를 따라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또 성경이 말하는 호칭 외에 다른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데로 매주 떡과 잔을 나누며 예배를 드리고 있고 공중모임 시에 자매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교파교회의 교리가 진리라고 여기고 여기에 열심을 내는 이들을 두려워하여서 그들과 같은 모양을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을 한다든지 너울을 벗는다든지 모임도 교파 중에 하나 인 것처럼 말을 한다든지 하는 경우입니다.
교파의 교리에 비추어 보면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은 잘못을 하게 하시는 분이 됩니다.
곧 죄를 짓게 하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저들의 교리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교리 데로 교파가 없는 것을 정죄하고 목사다 전도사다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정죄합니다.
심지어는 주기도문을 하지 않고 사도신경을 하지 않고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를 합니다.
그러면 초대교회와 성경의 교회들은 다 이단이 되는 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이들에게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들과 같은 모양을 취하고 오히려 정직하게 성경의 진리 데로 행하는 이들을 정죄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주님을 이단으로 만드는 것이며 성경을 이단의 책으로 만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죄를 짓게 하는 자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성경에 교파가 어디 있고 어떤 사역자를 목사라고 호칭을 했었나요?
그러므로 교파가 없기 때문에, 목사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이단으로 만드는 것이며 성경을 이단의 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 주신 진리를 버리고 비전이라는 미명하에 교파를 모방하고 있는 분들이 정신을 차리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주님의 말씀과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또 더 이상 우리를 말하지 말고 성경의 교회를 말하고 성경의 진리를 말하면 좋겠습니다.
19절20절의 율법과 성도와의 관계는 다음 기회에 다루도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