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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동칼럼 왜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영적 말씀이 희귀케 되었나? (이현웅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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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0월 21일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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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영적 말씀이 희귀케 되었나?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전3:13,14)


 

이 말씀은 옛 언약인 율법과 새언약에 대해서 비교해 말씀해 주고 있는 말씀 중에 옛 언약의 일시성과, 그것을 고집하는 이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13절은 옛 언약의 일시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원래 수건을 쓴 이유를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재해석을 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있는 영광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 그 영광을 가리기 위해서 수건을 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출34:35)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그 결국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쓴 것이라고 말하며 옛 언약의 일시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 마다 그 얼굴에 하나님을 만난 흔적 곧 광채를 얻었지만 그 광채가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인용해서 옛 언약의 영광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성경에서도 이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절)

이 말씀은 율법이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3:23-25)

이 말씀들은 율법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까지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의 일꾼에게 주어지는 영광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이스라엘은 이 일시적인 것을 종결지으시는 새언약이신 그리스도가 오셨는데도 여전히 옛 언약 아래 있기를 고집하므로 이제는 모세의 얼굴의 영광을 가렸던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가렸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모세의 글 곧 성경을 읽을 때에 그들의 마음을 덮어서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일시적으로 주어진 율법 아래 머물러 있기를 고집하는 이들의 영적 상태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수건을 덮은 채로 말씀을 보는 것과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날도 사람에 구원의 근거가 사람의 행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마음에도 수건이 덮여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만 이들은 여전히 구원을 위해서 사람의 행위가 더해져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원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사함을 받고 자범죄는 회개를 통해서 사함을 받는다”는 주장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의 뜻데로 살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장

또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주신 생활 규범이 율법이므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

“지금까지의 모든 죄를 예수님을 믿고 사함을 받았으니 이후로는 하나님 말씀데로 살면서 구원을 이루어야 주님 오시는 날에 휴거가 될 수가 있다”는 주장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은 그들이 비록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옛 언약 아래 있는 이들입니다.

새언약은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엡2:8절)

사람의 구원 여부가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2:16,딛3:5)


 

이들의 특징은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혹 깨달은 것처럼 말을 하면 대부분 남의 깨달음을 인용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이어져야 합니다만 오늘 다루어야 할 주제가 있기 때문에 그 주제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이들은 계속 옛 언약 아래 있기를 고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언약의 일꾼에게 주어진 영광이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 영광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람의 눈에는 천국을 전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것 증거하므로 영적인 사람들로 보입니다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영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외치지만 그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영적인 복이 아닙니다. 물질의 복, 자녀의 복, 건강의 복등 세상에 속한 복입니다.


이것들은 다 눈에 보이는 것 곧 세상 것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것에 집착을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보다 사람에게로부터 오는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에게 칭찬들을 만한 일을 찾아하고 사람들이 좋아 할 만한 말을 골라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추종자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추종자의 수만큼 정치적인 영향력도 갖게 되고 세상의 부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이 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이 지나가면 이것들도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것에 집착을 하는 이들은 이것이 수건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고 많은 추종자들을 갖게 되지만 그들에 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된 새언약의 일꾼들도 이와 같은 것에 미혹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도 분명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도 성도들의 삶은 변하지 않고 지식만 늘어 갑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주일날이 전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몇 몇을 빼 놓고는 썬데이 크리스천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주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더 이상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왜 일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의 마음이 수건으로 덮여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세상) 영광에 대한 집착의 결과입니다.


이제 일꾼들이 복음을 인한 고난을 더 이상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증거하기보다 우리를 증거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사도 권에 대해서 변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복음에 미혹된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모임에서 행해지고 있는 자기변호는 복음을 위한 것도 성도들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알지 못하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더 이상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함입니다.

곧 고난을 피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길에는 고난이 있어 왔습니다.


 

교회진리 곧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이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너울도 벗고, 형제자매 외의 다른 호칭들을 사용하고, 일꾼의 자격을 운운하면서 하나님의 주신 은사나 성령님의 능력 외에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장로들 위에 군림하는 사역자들은 복수 장로제를 위협하고 있고 일인 목회제도를 연상케 해 주고 있습니다.


마땅히 징계를 하여야 할 이들에게 징계가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다 일시적인 영광을 영원한 것보다 더 크게 여긴 결과입니다.


일시적인 영광에 집착한 이들의 마음이 수건에 덮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로 영혼을 깨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의 말씀을 이와 같이 적용을 해 보면서 주님 앞에 경계를 받습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덮는 세상 욕심의 수건을 벗겨 주시사 영원한 것을 보게 하시고 깨달은 말씀을 전하여 잠자는 영혼들을 깨우게 하옵소서